제자 칼럼

효율성이 아니라 사랑의 크기를 배워야 합니다.(담임목사님)

본문

효율성이 아니라 사랑의 크기를 배워야 합니다.
박용태목사
우리는 가치와 효율성을 따지는 데 익숙한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물건에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매겨져 있고 무슨 일을 하든지 투자 대비 성과를 따지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가치와 효율성을 따지는 문화가 정작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유혹과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길 잃은 양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복음 18:12-14)
예수님은 백 마리 양 떼 중에서 한마리가 길을 잃었을 경우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일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십니다. 특히 아흔 아홉 마리를 온갖 짐승이 우글거리는 산에다 남겨 두고 찾아나서야 할 상황인데도 그렇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를 찾는 도중에 다른 양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남아 있는 양떼가 맹수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두고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값어치와 효율성의 측면에서 볼 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양이 목자를 따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당연하게 목자를 따라 왔습니다. 그러나 길 잃은 양은 혼자 대열에서 이탈해 버렸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길 잃은 양은 엉덩이에 뿔이 난 못된 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는 아주 당연한 듯이 이 양을 찾아 나섭니다. 뿐만 아니라 길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는 그것을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아흔아홉 마리보다 더 크게 기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양의 값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의 값어치로 따지자면 어떻게 한 마리와 아흔 아홉 마리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양을 돌보는 목자의 자세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 당시의 목자들은 가치와 효율성의 원리가 아니라 이처럼 인격적인 방식으로 양을 돌보았던 것 같습니다. 또 그것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설령 길 잃은 양처럼 말썽이나 일으키고,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속을 썩일지라도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작은 영혼이라도 하나님은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 중에 더 작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한없는 은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잃어 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영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치와 효율성의 원리를 따라서 우리를 다루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늘을 두루마리로,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을 그 큰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알고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3월 11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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