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영적 개혁과 탄성한계 박용태목사(전주제자교회)

본문

탄성한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무줄이나 스프링처럼 탄력을 가진 물질이 어느 한도 이상 늘어나 버리면 더 이상 복원이 안되는 한계지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적인 면에도 탄성한계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도덕적인 질서가 무너질 때 어느 정도까지는 개혁을 통한 변화가 가능하지만 일정한 선을 넘어 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 집단과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를 보면 남유다의 16번째 요시아왕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퇴락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 나라 전역을 순행하면서 철저한 영적 개혁을 시도했던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 왕하23:25>고 합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예루살렘을 멸망으로부터 건져내지 못했습니다. 대대적인 영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왕하 23:25>고 했습니다. 므낫세는 요시야의 할아버지였는데 55년간 남유다를 통치하면서 남유다의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을 철저하게 어그러뜨렸던 것입니다. 요컨대 므낫세가 통치할 때 예루살렘은 도덕적, 영적 탄성한계를 넘어 버렸던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타락하면 비록 회개하고 돌이킨다 할지라도 과거의 죄를 다 씻어 낼 수 없는 지경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죄를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이 정신을 차리면 무엇이든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지점이 있습니다. 몇몇 개인의 노력으로는 공동체의 영적인 퇴락상태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이 부정과 부패에 물들어 있다는 증거가 연일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교회까지 추문에 휩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이런 상황에 대한 탄식이 자주 나오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습3:4>고 탄식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렘5:31>고 외쳤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시대가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와 세상을 짊어지고 스바냐처럼, 예레미야처럼 울부짖는 일꾼이 많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3>는 말씀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공동체의 영적 상태 때문에 탄식하는 선지자에게 주신 약속니다. 이 시대의 죄악을 짊어지고 울부짖는 자리에 서는 일꾼이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7월 5일(화) CBS전북방송 5분메시지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5분메시지 매주 화요일 21시 29분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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