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경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박용태목사(전주제자교회)

본문

하나님은 경계를 뛰어넘게 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 요셉, 모세, 다니엘 등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지역과 언어,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뛰어 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주던 익숙한 환경을 떠나 낯설고 위험한 곳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해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에 배인 노예 생활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자유롭고 책임 있는 삶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 자신들을 얽어매었던 한계, 생각과 삶과 신앙의 경계를 뛰어 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실패했던 가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남과 자신을 구별하면서 경계를 짓고, 타인을 잠재적 위협요소로 생각하면서 적대감을 품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죄인의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경계를 뛰어넘는 삶으로 이끄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명령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경계를 뛰어 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지역적,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사회적 경계를 뛰어 넘지 않으면 복음의 증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시 사회 속에서 말할 줄 아는 짐승 취급을 받던 노예를 형제로 받고, 개만도 못한 존재요 지옥의 불쏘시개로 간주했던 이방인들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된 교회를 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계를 뛰어 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는 말이 번지고 있는데, 상당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문화 속에서 죄인으로 간주되었던 세리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면서 경계를 뛰어넘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 주셨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 창녀들을 받아 주셨을 때 그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명백한 죄인이요, 회개와 삶의 변화가 필요한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에게도 소망이 있다 말씀하시면서(마21:31),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동성애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단순히 혐오감을 표출할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이라도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슬람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우리 곁에 가까이 오려는 이슬람을 배척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전도가 자유롭지 못한 지역, 선교사의 신분을 밝히지도 못하는 지역에 복음의 증인을 파송하려고 하는 입장에서는, 우리 곁에 다가오는 이슬람을 오히려 환영하고 맞아 주는 것이 도리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슬람을 단순한 테러집단으로 간주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적대심을 고취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도덕적, 종교적, 문화적 경계가 있는데, 결국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 경계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경계를 뛰어넘는 용기를 발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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