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박용태목사(전주제자교회)

본문

고대사회는 사람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귀족과 자유인, 노예 등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있었고 남성 여성 등, 성별에 따른 차이도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말씀은 당시 문화에서는 엄청난 주장이었습니다. 또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 고전12:13>고 선포하는데, 이 또한 당시 사회 안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할례 받은 유대인과 할례 받지 못한 유대인 사이에는 종교적 신념에 의한, 뛰어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예 노동에 기초한 경제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제국에서 종이나 자유인이 한 몸이라는 표현은 거의 불온한 사상으로 비쳐 졌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모든 종교적 장벽,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차별의 장벽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을 은혜와 믿음 안에서 하나 되게 만들었습니다. 결코 하나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교회가 누리는 은혜의 특권이었던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모든 사회적 차별과 문화적 장벽이 깨트려졌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되는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부르시어 하나의 예배공동체, 마치 한 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으로 엮어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실 날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분열과 다툼과 갈등을 뛰어 넘어 하나 되게 하시는 은혜를 끊임없이 사모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타락하고 신앙이 병들게 되면 이런 하나 되게 하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합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18-19세기 노예제도를 찬성했던 미국교회나 20세기 흑인들을 정책적으로 차별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기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 됨을 의도적으로 깨트리는 일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문화 속에서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삶을 살고, 같이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이 병들게 되면 교회 안에서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이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귀찮게 여깁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피곤하게 생각고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일만한 작은 여유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깊은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교회는 극장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서도 충분히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타락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서로 하나됨으로서만 온전해 질 수 있는 교회가 서로에 대한 관심을 잊어버린 채 자기 만족, 자기 평안만 추구하는 곳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외로운 사람들이 있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 보면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연약하고 신앙이 병들면 이런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심각한 병인 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은혜와 사랑 안에서 서로 하나됨으로 복음의 큰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0
로그인 후 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