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거룩한 왕따 박용태목사(전주제자교회)

본문

<왕따>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까지 올라 있는 표현이지만, 우리말 어법상 본래 기형적으로 만들어진 ‘은어’였습니다. ‘집단적인 따돌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좋은 뜻을 담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거룩한 왕따>라는 말도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다가 왕따 취급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묵상하는 예레미야서를 보면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할 때 예레미야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예레미야를 붙들고 <반드시 죽여 버려야 할 사람>이라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무너져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예레미야를 고발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비애국적이며 반민족적이라는 이유로 예레미야를 고소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주장인즉,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고 하나님이 명백하게 심판을 선언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민족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요 성전이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과 자기 확신을 더 앞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예레미야 시대의 제사장이요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 자신도 제사장 출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렘1:1). 예레미야는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로 사역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요컨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예레미야의 동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하였기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했고, 나아가 고발을 당했던 것입니다. 동료들의 무지와 하나님께 대한 무감각,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대와 저항이 예레미야를 매우 난처하게 만들고, 마음 아프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동료들로부터 배척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동료들을 버리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목회자가 목회자의 죄를 알고, 의사가 의사의 허물을 잘 압니다. 사업가가 사업가의 함정을 알고, 교사가 교사의 유혹거리를 더 잘 압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자신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책망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 각 전문영역이 너무 부패한 나머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하면 동료들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야 할 때가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동료들로부터 배척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평화해야 하겠지만 사람과 평화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불화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하다가 동료들로부터 미움을 살 수 있습니다.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즐겁지는 않을지라도, 기꺼이 <거룩한 왕따>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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