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100년 전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는 전주 3.1 독립평화운동 권혜수집사(전주제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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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중략)....또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는 것이라.” 기미 독립선언문 중에서

저는 지난 7월 28일자 주보 칼럼에 ‘정의와 평화를 위한 다크 투어리즘’이란 주제로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우리 지역의 다크 투어 장소를 하나씩 소개해 볼까 합니다. 그 첫 번째 다크 투어로 100년 전에 이 땅에 있었던 전주3.1독립평화운동의 발자취를 기전학교와 신흥학교 학생들을 따라 떠나보고자 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1919년 3월 1일 이승훈 등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3.1독립평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 단체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책임자였던 서울 남대문교회 함태영은 독립선언서 한 뭉치를 기전학교 출신인 임영신(광복이후 초대 상공부장관, 중앙대 총장 역임:1899∼1977)에게 전달하였습니다. 3월 1일 저녁 전주에 도착한 임영신은 서문밖교회(지금의 서문교회) 이돈수 장로에게 왔고, 그는 당시 서문교회 담임인 김인전 목사를 찾아가 상의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는 동생 김가전, 교회조사 이수현, 교회청년 최종삼, 윤건중 등은 학생들을 동원하는 한편 신흥학교의 교사 유병민, 문병무와 기전학교의 교사 함의선, 김지순 등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일부 학생들과 신흥학교 지하실 등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였습니다. 드디어 전주 장날이었던 3월 13일 정오에 독립만세의 함성이 전주지역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신흥학교 및 기전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전주면 서정(현 전주교대부설초 부근)에 위치한 공립제2보통학교 부근에서 우편국(현 경원동 우체국) 앞까지 행진했습니다. 일본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이 이어졌지만 흩어지는 듯 다시 모이면서 해질 무렵에는 우편국 앞에 5천여 명의 군중이 모이게 됐습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434명이고 이 중 340명이 기전학교 학생들이었다고 합니다.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구속된 기전학생 가운데 임영신, 김인애, 최요한나 등의 기전학교 13명의 학생들은 4일간의 단식 투쟁을 하면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저항하였습니다. 여학생들은 법정 투쟁에서 “우리가 어찌 너희들의 판결에 복종할 사람이냐? 너희들은 우리의 강토를 강탈하였고 우리의 부형을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3천리 이 강산에 주인이 되려는 우리를 비법이라 하니 이는 비법의 판결이다”라고 대항하였습니다. 그 때 일제 관헌은 한 여학생의 귀를 베어서 위협하고 여러 여학생들을 모두 옷을 벗기고 모욕적인 욕설은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여학생들은 그들 자신들이 선택한 행동의 정당성과 하나님을 믿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고로 일제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전주3.1독립평화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유죄판결을 받은 인물은 60명이었고, 그 중 기독교인은 21명이었습니다. 기전여학교 관련자 13명, 신흥학교 관련자 7명(교사 2명, 학생 5명), 서문교회 관련자 1명이었습니다. 이는 전주3·1독립평화운동이 기전학교와 신흥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올해가 3.1독립평화운동이 발생한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그 날의 의미와 아픔을 생각하며 온 몸으로 경험하고 싶으시다면 기전학교와 신흥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만들었던 ①신흥학교에서 출발하여 김인전 목사의 기념비가 있는 ②서문교회를 거쳐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③매곡교를 지나 태극기를 옮겨놓았던 장소이며 평화운동의 출발지인 ④공립제2보통학교(현 전주교대부설초등학교)에서부터 ⑤싸전다리를 지나 ⑥풍남문을 거쳐 ⑦우편국(현 경원동 우체국)까지 천천히 걸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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