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은혜를 누릴 때, 배짱이 필요합니다. 박용태목사(전주제자교회)

본문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항상 은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어떤 사람이 따져 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은혜를 말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강조하기를 ‘아하 내가 죄를 지어도 되는 거였구나. 죄를 지었다고 해서 버림받는 것은 아니구나’하는 것을 알기까지 은혜를 말해야 한다고 했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지만, 은혜를 자기 헌신, 자기 행위의 대가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상 마음의 교만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밀어 주시는 은혜의 손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스스로 초라해 진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연약함을 수치로 생각하고 강함을 자랑하는 세상 풍조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자기를 과시하려 하거나, 자신을 포장하는데 점점 익숙해져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풍조야 말로 은혜의 본질을 놓치는 모습입니다.
실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없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버텨 낼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다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 채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허물이나 잘못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허물이나 죄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힘입지 못할 영혼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 죄와 허물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거나,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죄와 허물이란 크고 작건 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심각한 문제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하면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고 새롭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허물이 많은 인생입니다. 그는 노골적인 범죄도 저지른 적이 있고, 스스로 고칠 수 있는 허물인데도 고치지 못해서 노년에 많은 대가를 치르며 살았습니다.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아들 때문에 도망을 치는 수모도 겪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다윗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외칩니다. 고통 중에서 외치기를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시143:12)’ 부르짖었습니다. 명백한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돌보시고, 용서하시며 새롭게 빚어주실 분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령 우리 죄 때문에 대가를 치르며 고통을 겪고 있다 할지라도, 주님 품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설령 부끄러울지라도 주님 얼굴을 바라보고 주님 품을 파고드는 배짱이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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