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한글날

본문

한글날
1942년 함흥의 영생여학교사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함흥영생고등여학교(咸興永生高等女學校) 학생 박영옥(朴英玉)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로 대화하는데 불온한 언동을 했다고 해서 경찰에게 체포를 당했던 것입니다. 당시는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눈앞에 두면서 우리 민족정신을 심하게 억압하던 때였습니다. 우리 이름과 성씨를 버리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는 창씨개명정책과 일정한 시간 모든 사람들이 천황이 있는 곳 향해 절을 하게 만드는 동방요배, 신사참배 등을 강요했습니다.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학교에서도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로 강의하고 일본어를 기본과목으로 가르치면서 학생들도 일본어만을 사용토록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박영옥을 체포했던 경찰은 야스다(安田稔)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했던 안정묵이라고하는 조선인이었습니다. 일본경찰은 박영옥을 조사하면서 이 학생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정태진선생을 체포했는데 당시 정태진선생은 서울에서 조선어학회 운동을 하면서 우리 말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빌미로 일본은 1942년 10월 1일부터 이듬해까지 조선어 사전 편찬작업을 하고 있는 조선어 학회 관계자 서른 세명을 체포하고 그 중 16명을 기소했습니다. 결국 이극로,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다수 한글학자들이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독립운동의 한 형태”라는 이유로 투옥되어 고초를 겼었습니다.
조선어사건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 사건의 단초가 되었던 함흥 영생여학교가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04년부터 캐나다출신 선교사들이 함흥에 자리를 잡고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 중 던칸 맥리(Duncan M, MacRae), 우리 이름으로 하자면 마구례 선교사를 중심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함흥영생여학교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함흥여학교 뿐만 아니라 전주에 있던 신흥학교 등 당시 대부분의 미션스쿨은 민족정신의 요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일제의 강압정책에 대항하면서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조선어 말살정책에 대항하면서 우리말과 글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을 자랑스러운 업적이라고 말하지만, 100년전까지만 해도 한글은 ‘반절’,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천시를 당하고 심지어 여성들의 문자라고 해서 암클이라는 비아냥을 듣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892년 장로교선교공의회는 “모든 문서 활동에 있어서 한자의 구속을 벗어나 순 한글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독교가 ‘한글 전용’ 원칙을 확립하면서 성경, 찬송 뿐만 아니라 교계신문과 각종 문서를 전부 한글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한글 사용의 중심지가 되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도 한글을 읽고 써야만 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역사에는 교회 일꾼이 되기 위해 한글을 읽고 쓰는 시험을 치른 기록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배우기 어려운 한문은 양반과 평민을 나누는 큰 장벽이었는데 누구나 배우기 쉬웠던 한글은 결국 신분차별이라는 과거의 굴레를 끊어버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적 성장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908년에 한글학회의 전신인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고 한글 연구의 기틀을 잡았던 주기경선생을 비롯하여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최현배, 김윤경, 이윤재, 김선기 같은 분이 다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에 기초해서 민족과 사회를 흥왕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한글날, 믿음의 선조들이 남긴 업적을 추억하면서 이 나라와 민족을 흥왕하게 하는 교회와 복음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월 9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0
로그인 후 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